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토머스 제퍼슨 (문단 편집) === 대통령이 되다 === >... a wise and frugal government, which shall restrain men from injuring one another, which shall leave them otherwise free to regulate their own pursuits of industry and improvement, and shall not take from the mouth of labor the bread it has earned. This is the sum of good government, ... >... 현명하고 검소한 정부로서,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지는 못하게 하되, 그 외에는 각자에게 맡겨 자유로이 스스로의 근면과 발전을 자율적으로 추구하도록 하며, 노동을 통해 얻은 양식을 빼앗지 않는 것. 좋은 정부라 함은 이 모든 것을 합한 것이고, ..." >---- >대통령 취임 연설 中 그 후 다시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1801년 3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꽤 험난했다. 당시 선거에서는 토머스 제퍼슨과 [[에런 버]]가 선거인단에게서 정확히 동수(73표)의 표를 얻어 1801년에 하원 투표로 넘어갔는데, 35번이나 투표를 치르고도 대통령이 결정되지 않았다가 36번째 투표에서 [[메릴랜드]], [[버몬트]], [[델라웨어주|델라웨어]], [[사우스캐롤라이나]]가 입장을 바꿈으로써 제퍼슨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된 것은 연방주의자들이 그나마 제퍼슨보다 성향이 가까운 버를 밀어주다가, 연방주의자의 거두이자 버와 사이가 엄청나게 나빴던 [[알렉산더 해밀턴]]이 36번째 투표 직전에 입장을 번복하고 정적인 제퍼슨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시 미국에는 16개 주가 있었는데, 처음 투표 당시에는 8개 주가 제퍼슨을 지지했고, 6개 주가 버를 지지했으며, 2개 주가 기권을 했다. 미국 헌법에 따르면 과반수 주의 지지를 얻어야 대통령이 될 수 있기에 제퍼슨은 딱 한 주가 모자라서 첫 투표에서 대통령이 되지 못했지만 결과를 볼 때 제퍼슨이 대세였던 것은 부인할 수 없었는데, 버는 제퍼슨과 정적이었기 때문에 끝끝내 후보 사퇴를 거부했고, 결국 투표가 반복된 것이다. 버는 당시 헌법에 따라 2등 득표자로서 부통령이 되었지만 제퍼슨의 정책에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다. 웃긴 건 [[에런 버]]는 제퍼슨과 같은 [[민주공화당(미국)|민주공화당]] 소속이었다는 것. 같은 당 소속인데도 버와 제퍼슨은 죽어라고 싸워댔다. 사법부 역시 대부분은 전임 존 애덤스가 임명한 인물들이어서 사사건건 제퍼슨을 견제하였다. 그래서인지 제퍼슨은 [[알렉산더 해밀턴|해밀턴]]과의 협의로 연방주의자들과 타협해 내각 자리를 마련해주고[* 이때 연방파들도 대선 패배의 후유증 등으로 해밀턴파와 애덤스파가 싸우고 있었다.(...)] 1기 재임 시절엔 연방주의 기조도 무리하게 바꾸지 않는다. 허나 그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시절 연방주의자들의 정책은 높은 과세로 인기를 잃은 데다 수장들이 정치를 은퇴하는 등 지도부가 사라져[* 애덤스와 존 제이는 공직에서 은퇴했고, 해밀턴은 1804년 부통령 에런 버와의 결투 도중 사살당한다. 사실 이때만 해도 성격이 온화한 편이었던 제퍼슨은 에런 버도 정적보단 부통령으로 대우해주고 있었는데, 자기한테 말도 안하고 결투가 허용되는 다른 주 가서 부통령이 전직 재무장관을 사살한 사건에 충격받은 나머지 이후부턴 에런 버를 정치적으로 매장시키는데 총력을 쏟아붓는다.] 점차 소멸하여간다. 제퍼슨의 재임 기간 동안 벌어진 큰 사건으로는 미국의 영토를 크게 넓힌[* 항목의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당시 미국 영토 기준에선 나라 크기를 2배로 늘리는 수준이었다.], 당시 [[나폴레옹]]과 한 [[루이지애나 구입|루이지애나 거래]]가 있으며[* 사실 프랑스 입장에선 웃픈게, 미국 독립 전쟁 지원해주다 재원이 쪼그라들어 대혁명을 맞고 왕정이 무너졌는데, 그 재원 충당하고자 나폴레옹이 선택한게 루이지애나를 싼값에 미국에 넘기는 것이었다.] [[해적]]들을 토벌하기도 했다. 미국 시민권을 따기 위해 [[이민]]자의 체류기간을 5년에서 14년으로 늘린 외국인법이 폐지되었고, 보안법으로 체포된 기자들과 시민들도 [[석방]]시켰다. [[노예]] 무역을 금지하는 법안에 서명하였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문명화시키려고 노력했다.[* 허나 이에 대해선 비판도 있는데, 노예제를 반대하고 무역도 금지했으나 정작 현존하는 노예는 주의 자율에 맡긴다는 식이었고(지금 와서 보면 안일하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어쨌든 당대 반연방주의자로 주의 권리를 존중했던 제퍼슨은 설령 그게 잘못된 거라 할지라도 주 자체적으로 해결할 문제라고 보고, 자유주들을 늘려가 노예 허용주들을 여론으로 압박하다 보면 언젠간 자연스럽게 노예제가 사라질 것이라고 봤다.) 심지어 그 자신도 노예를 소유한 대농장주였기 때문이다. 뮤지컬 [[해밀턴(뮤지컬)|해밀턴]]에서도 이 점을 들어 해밀턴에게 신나게 까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미시시피 강 동부 지역을 미국의 영토로 선언해 동부 인디언들은 백인 문화로 편입시키고 나머진 미시시피 서부로 몰아내는 정책을 추진했다. 이 때문에 이때부터 상당수 원주민들과는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한다. 또한 클라크와 루이스 원정대(Lewis and Clark Expedition)를 보내어 미국 서부에 대한 과학적 탐사를 시키지만, 서부에 대한 영유권 주장도 포함하고 있어서 당시 서부를 통치하고 있던 스페인과 은근한 신경전도 벌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